최근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숙번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궁금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3번째 왕, 이방원의 심복이자 충신이었던 문신 이숙번에 대해서 이 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숙번의 삶과 그가 조선시대에 미친 영향은 어떤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숙번은 누구인가?
이숙번은 고려시대 공민왕 시대에 태어나서 조선의 4번째 왕인 세종대왕 시대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조금 들여다보면, 어려서부터 머리가 굉장히 좋았고, 총명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최초로 치러진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입니다.
문과에 급제한 이후,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으로서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서 합니다. 2022년 1월 달에 개봉한 '킹메이커'라는 영화에서와 같이 이숙번은 2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서 태종을 왕이 되도록 도와준 일등 공신이라고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때 나이가 고작 26살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그야말로 어린 나이에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것입니다.
이숙번은 태종에게 각별한 존재였지만 결국 그 끝은 왕의 근처가 아닌,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죽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큰 힘을 실어주었던 사람을 유배를 보내게 된 데에는 분명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시게 되면, 이숙번의 말로가 왜 좋지 않았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2. 이숙번은 이방원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이숙번은 이방원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패기가 넘친 행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왕인 자신의 일을 도울 수 있겠냐라는 질문에 그런 일들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쉽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습을 보고 태종은 자신의 젊은 모습에 투영한 것 같습니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이숙번은 지안 산군사(안산군지사)라는 직책을 얻게 됩니다. 보통의 경우, 병력을 관리하는 직책은 친인척에게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방원은 이숙번에게 군의 핵심 지휘권을 이행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직책을 부여받은 일은 굉장히 예외적인 일로 훗날 이숙번이 안하무인 하게끔 하는 촉매가 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이후 왕자의 난 때, 자신이 관리하고 있던 사병들을 출동시켜서 왕자의 난을 성공시키는 일등공신 중에 한 명이 됩니다.
이방원에게 이숙번이라는 존재는 충신이었고, 가장 아끼는 신하였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잘 드러나는 예시 중 하나는 바로 서대문과 관련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날, 한양의 사대문 중의 하나인 돈의문(서대문)에 사람이 오가며 내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생각한 이숙번은 돈의문을 막아버렸습니다. 이런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 지나고 난 후, 백성들의 성원과 풍수가의 조언에 따라서 서대문의 위치를 바꾸고자 그 위치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정해진 문의 위치가 이숙번의 집 앞으로 결정되자 이에 노하여 집 앞으로 서대문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이를 반대했습니다.
조선시대는 보통 건물의 위치나 터를 잡을 때는 풍수가의 조언을 받았습니다. 누군가의 조언을 받았다고 한들, 최종 결정권자는 왕이기 때문에 이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어명을 어기는 것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 정서로는 말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후에 돈의문의 위치가 자신의 집 앞으로 바뀌려고 하자, 이숙번은 문의 위치를 정종이 거처하고 있는 인덕궁 앞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이숙번이 원하는 대로 문의 위치가 바뀌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백 번 양보해서 자신의 집 앞에 문이 생기는 것을 거절하는 행위를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정종은 이방원의 형이자, 태조의 아들인데 이것을 성공시킨 것은 역사적으로, 정서적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이방원과 이숙번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일 것입니다.
3. 유배를 가게 된 이유
이숙번은 당대의 직급과 서열을 떠나서 강한 사람의 표본으로서 조선 초기에 중대한 인물입니다. 그가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서대문이 그중 하나겠습니다. 이후에도 소위 말해, 망나니와 같은 행동들을 많이 했는데 이숙번에게 위기가 찾아온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맹인 승려와 사대부가의 과부의 불륜 사건인데, 이 두 사람의 처벌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숙번과 태종의 의견이 엇갈리게 됩니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인데, 승려와 사대부 집안의 과부가 서로 내통한 것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어린 시녀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당대의 파장이 커서 조정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받게 된 큰 사건이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이 두 사람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1) 과부 제석비가 평민의 집안이 아니고 사대부 집안이므로, 이를 가만히 둘 경우, 풍속이 무너질 수가 있기 때문에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함.
(2) 태조 이성계는 무인으로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 교리에는 호의적이었지만, 훗날 전통적인 것을 거부하는 신진 사대부와 역성혁명을 주도하는 사람으로서 불교를 마냥 권장할 수는 없었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들은 실질적으로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음. 따라서 승려의 존재 자체로도 좋은 인상이 아니었음.
(3) 승려와 제석비가 서로 아이를 갖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어린 시비(시녀)를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으므로 죄가 중하다고 판단함.
당시 법으로는 장형 80대이기 때문에 이숙번은 사형이 아니라 장형에 처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 죄가 무겁다고 판단한 조정은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사실 장형은 태형보다 한 단계 더 무거운 형벌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곤장과는 다릅니다. 죄수를 묶어두고 신체의 여러 부위를 간수들이 때리는 형식입니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하자면, 세종대왕의 가마를 만든 장영실이 그 가마가 부서져서 받은 형벌이 장형 100대입니다. 물론 실제로 세종대왕의 부탁으로 80대만 맞게 되었습니다만, 장형이라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범죄자에게 처한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이숙번은 왕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궁궐을 출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후에 세자와 내통하는 등과 같은 몇 가지 태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사건들이 있었고, 신하들은 이숙번을 무례함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방원은 이숙번을 유배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인 세종에게도 자신이 죽고 나서도,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4. 어떻게 삶을 마무리했는가?
경상남도 함양으로 유배를 가게 된 이숙번은 이후에 세종의 부름대로 한양에 올라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집필할 때, 왕자의 난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때 이숙번을 부른 것입니다. 1차, 2차까지 있던 왕자의 난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이숙번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용비어천가는 한국어로 쓰인 첫 번째 책입니다.
이때에도 이숙번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미 세종은 선왕의 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유배를 풀어주지 않고 단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숙번은 후에, 경기도 근처에서 살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세종 22년인 1440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숙번이 죽기 직전까지도 신하들을 이숙번이 경기도가 아니라 함양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고 합니다.
이숙번의 묘는 경기도 시흥시 물왕저수지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